중혜왕(1342년)에 태어난 삼봉 이성계를 만나다
삼봉 정도전은 충혜왕(1342년)에 태어나 우왕 9년(1383년)인 지금 떠나보낸 성상이 벌써 마흔 하나! 열아홉에 과거에 급제하고, 마침 공민왕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개혁에 동참하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신돈 때문에 실망하고, 공민왕마저 시해된 뒤 이인임과 경복흥 등 부원배, 간신배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관직을 잃고 떠돈 지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실의에 빠져 덧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이번 함주 여행은 어쩌면 최후의 희망일지도 몰랐다. 삼봉은 이성계를 만나러 함주에 도착하여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병사 중 계급이 가장 높은 병상에게 건넨다. 병사들은 그를 둘러싸고 거친 산지를 평지처럼 걷는 것이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 역시 이성계의 군대로군...... 이 나라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군대는 질리도록 봤지만 , 이처럼 군기가 제대로 잡힌 곳은 처음이야, '라고 생각했다. 삼봉은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마주 않았다. 충숙왕 4년(1335년)에 태어난 이성계는 당시 47세. 기력과 지력이 한창 원숙해진 때였다. 자신이 건넨 서찰을 가만히 읽고 있는 이성계의 매서운 눈매를 보며, 정도전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포은 선생이 소개장에 삼봉 정도전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글과 함께 써준 추천장이었다. 이성계는 평소 존경하던 선비 중 하나인 포은 정몽주의 서찰을 읽고는 부드러운 눈으로 정도전을 바라보았다. 나중에는 이 두 사람과 정몽주의 길이 완전히 갈라질 날이 오겠지만, 정몽주와 정도전은 원래 같은 스승(이색) 밑에서 배운 동문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이성계의 병사를 조련하는 모습을 구경하자는 제안에 정도전은 기뻐하며 막사를 나서는 이성계를 따랐다. 아까 잠깐 보았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질서 정연한 교련 모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성계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칭찬하며 두 사람은 마치 수십 년 지기라도 되는 듯, 그날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정도전이 들뜬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려는데, 문득 병영 앞에 서 있는 장대한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어제 그 둘레를 돌며 병영을 내려다보았던 그 소나무였다. 정도전은 소나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품에서 작은 칼은 꺼내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정도전은 구슬땀을 흘리며 칼을 꽂고 비틀고 닿기 기를 반복했다. 철갑 같은 소나무 껍질을 솜씨도 없고 변변한 도구도 없이 벗겨내기란 생각보다 무척 힘겨웠다. 사람 등판만큼 벗겨내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교련 중이던 이성계의 병사들은 대체 저 선비가 뭘 하나 싶어 흘깃흘깃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적당한 크기로 소나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자, 정도전의 손은 피부가 벗겨지고 군데군데 피가 흐르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운 듯 그는 이마의 땀을 소맷자락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봇짐을 뒤적거려 붓과 먹을 꺼내더니, 하얗게 드러난 나무 속살에다 이렇게 시를 썼다.
한 그루의 소나무여, 아득한 세월을 견뎌
몇 만 겹으로 둘러싼 산속에서 자라났꾸나.
다행히도 훗날 다시 보게 되려는가.
인간 세상의 만남은 잠시 지나간 자취 되는 것을.
정도전, 막사 앞 소나무에 시를 새기다
이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 만남이었다. 이 만남 후에 한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두 사람의 만남은 실로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위력적인 문과 무의 결합을 이루었다. 아득한 세월을 견뎌온 왕조가 두 사람의 협력으로 무너졌고, 한 사람은 옥좌를 , 다른 사람은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여 새로운 사상과 제도로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정도적의 마지막 행동은 약간의 의문이 남긴다. 그가 이성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려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것을 편지에 쓰지 않고, 진땀을 흘려가며 껍질을 벗겨 소나무에 남겼을까? 마침 종이를 가진 게 없어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도전은 함주 여행 도중에 몇 편이나 시를 남겼다, 그걸 볼 때 늘 지필묵을 가지고 다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설령 마침 종이가 떨어졌다 해도 잠깐 발길을 돌려 막사에서 시를 쓰고 이성계에게 직접 전해주면 될 것을, 뭐 하려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볼 수 있는 병영 앞 나무에다 글을 남겼다는 말인가? 이성계가 훌륭한 무를 보여주었으니 그의 짝이 될 자신은 문을 멋지게 과시하려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모두가 볼 수 있게 소나무에 시를 남긴 데에는 일종의 보장을 받으려는 속셈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며 권력의 외곽을 맴돌았다. 또한 이성계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지만 (어쩌면 훗날의 혁명 계획까지 토의했을지도 모르지만), 시의 내용처럼 한 번의 만남은 덧없는 것이 되기 쉽다. 이성계가 나중에"그런 일개 선비의 말 땨위야" 라며 자신을 외면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병영의 장고와 병사들, 그리고 이성계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볼 수 있게 그리고 자신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뚜렷이 인지하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계산한 조치였으리. 한편 매일처럼 소나무의 글귀를 쳐다볼 이성계의 뇌리에 이 만남의 의미를 똑똑히 새겨 두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정도전의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이성계, 정도전의 정게 복귀를 돕다
이성계는 이듬해에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도록 힘을 써준다. 그 뒤로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날로 도타워졌다. 마침내 혁명에 이른다. 개국공신이 된 정도전은 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새 나라의 법률 체계를 만드는 데서부터 새 도읍과 궁궐의 설계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일을 도맡아, 조선왕조 오백 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왕의 권력 앞에서 신하는 늘 한 가닥 불안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왕이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임하지만, 신임이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 아닌가? 또한 지금의 왕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준다 해도, 다음 대의 왕까지도 그럴까? 박학다식한 정도전은 새 왕조가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이 숙청당하는 일이 역사에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동 정벌을 빙자해 병권까지 장악하는 한편, 이성계의 어린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워 그 스승이 됨으로써 '인간 세상의 만남의 덧없음'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그에 대한 의심과 반발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만다. 1398년, 그는 결국 이방원의 손에 처참히 죽고, 앙조의 설계자이면서도 왕조의 역적이라는 오명을 오랫동안 벗지 못하게 된다(1985년. 조선왕조가 거의 멸당할 때가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그이 명예가 회복된다)
(정도전이) 개국할 즈음에 종종 취주에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기용한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일이 하나같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으니,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으뜸가는 원훈이 되었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 해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마냥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험을 세우기를 부추겼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 한「고려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정몽주,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체하고자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결국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이방석)의 세력을 믿고 자기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새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태조 7년(1398년) 8월 26일 기사
끝가지 정도전을 믿고 의지했던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이 벌어진 다음 태종을 혐오하며 함주로 가서 틀어박힌다. 늙어버린 몸에 사랑하는 자식도, 믿음직한 친구도 잃고 지난날의 영광을 반추하며 살았던 그는 옛날 정도전이 남긴 소나무의 시를 다시 찾아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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