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란 어떤 곳인가
가정이란 어떤 곳이며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학문으로 집이라는 뜻의 '가'와 뜰안이라는 뜻의 '정'이 합해진 개념이다. 같은 집에 살면서 함께 일하는 집단, 최소의 그리고 처음 단위의 사회를 가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 집에는 누가 사는가. 가장 적을 때는 부부 두 사람이 산다. 어떤 때는 부부로서의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산다. 그리고 때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이 살기도 한다. 어떤 집에는 증손자와 증손녀까지 사는 일도 있다. 사람들은 두 세대 이상의 여러 가족이 있는 가정을 대가족이라고 부르며. 부부 중심의 가정을 핵가족이라고 부른다. 옛날의 동양 사회는 대부분이 대가족이었는데 비해, 오늘의 서구인들은 모두가 부부 가족으로 만족하고 있다. 핵가족은 부부가 중심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로 된 횡적 관계가 기반이 된다. 그러나 대가족 제도는 부모와 자녀관계과 중심이기 때문에 종적인 관계를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어느 편이 더 중한지는 지금도 일률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나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며느리는 반 가족으로 밖에는 취급하지 않았다. 자식을 낳으면 완전한 가족이 되나, 시집을 와서 자식을 낳기까지는 예비 가족 비슷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혈연제도가 중심이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계약관계에 그린다고 봐온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가,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주장하면서 부자관계는 부부관계보다 소중하다는 글을 썼다가 부인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는 애기를 들었다. 서양 여성 같으면 이혼을 제기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도 어머니가 되면 남편과의 관계는 계약관계 일 수 있어도 자녀와의 관계는 엄연히 혈연관계가 된다. 그런 면에서는 자녀가 부부간의 계약관계를 혈연관계로 확장시켜 주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아들의 성격을 통해 남편을 알게 되며,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의 인간됨을 미루어 보는 경우가 자주 있다. "큰 놈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도 젊었을 때는 저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아내의 말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들을 수 있다.
사랑 없이는 가정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정이 출발할 때는 부부관계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기를 낳아 놓고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성년이 된 남녀가 삶을 함께 하면 그것은 이미 부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의 남녀 간의 삶은 선택과 사랑이 같이했음을 뜻한다. 사랑이 없는 일시적 불장난에서 임신을 했다면, 그것은 아기가 때어났다고 해서 가정이 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가정의 하나의 조건은 같은 집에 산다는 일이며, 같은 집에 머문다는 것은 사랑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정이 되는 중요한 조건은 부부나 부모가 같은 집에 산다는 것이나,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 있는 삶이 가정이라는 뜻이다. 남녀가 사랑할 때는 가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거나 미움으로 변한다면 별거를 하기도 한다. 별거 중의 부부는 참다운 부부일 수가 없다, 한집에 살고 있지 않으면 사랑은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부는 계약에서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헤어지면 남남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혈연적 운명에 속하기 때문에 남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진실이 있다. 부부는 이혼을 하면 남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호적에서 떼놓았다고 해서 내 아들이 아니거나 아버지가 아닐 수는 없다. 계약은 선택에 의한 사랑이지만, 피는 본래부터의 존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부자간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진 다든지 모녀간의 사랑이 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무의미 해질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부부관계보다는 어렵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어도. 이렇게 본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정의 조건은 사랑에 있다고 하겠다. 사랑이 없다면 가정은 이미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은 어떤 것인가. 이상스럽게도 가족관계의 사랑은 선택적이기보다는 자연적이며 자연적이기 때문에 본능적인 성격이 강하다. 정신적 측면보다도 육체적 측면이 비중 크게 나타나곤 한다. 우선 부부간의 '성애'가 그렇다. 부부간의 사랑은 성적 사랑을 전제로 삼고 있다. 옛날같이 남녀교제가 엄격히 규체당하고 있을 때의 결혼은, 곧 성적 관계가 맺어지면 그것은 운명적으로 지켜져야 했다. 성적 사랑은 독점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제삼자의 용납을 허락할 수가 없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은 절대적인 계율이다. 물론 최근에 이르러서는 성애의 유일 절대성이 깨져 가고 있다. 그것은 성애가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간의 성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성애가 완전히 제약되거나 불가능해지면 부부관계는 성립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가족관계는 본능적 성애만이 아니다. 자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에의 사랑도 본능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며, 내 딸이기 때문에 느끼는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부모들이 가족관계의 사랑이나 자녀들에게 대해서는 맹목적인 사랑을 베푸는 때가 많다. 지혜 있는 제삼자가 보면 어리석을 정도로 본능적인 사랑에 빠지곤 한다.
본능적 사랑보다 가치 지향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랑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내 자식이기에 유산을 남겨 주어도 아깝지 않으며, 내 부모의 잘못은 사회적 과오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옹호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본능적 사랑에 사로잡혀 사회적 가치와 인간 본연의 자세에서 어긋난다면, 우리는 보다 훌륭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후진국가가 불행한 원인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내 가정과 문벌을 존중히 여기는 나머지 사회나 국가적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여긴다. 말하자면 폐쇄적인 가족주의가 사회적 발전과 국가적 의무를 약화시켰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 지상주의가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성장을 그르쳤고, 심지어는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비운으로까지 떨어졌다. 아마 3.1 운동이 남긴 귀중한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가정보다 먼저 국가를 생각했고, 가족보다도 민족의 장래를 더 걱정하게 된 변화라고 볼 수도 일을 것 같다. 지금도 우리는 내 가정 때문에 사회적 피해를 입히는 것이 잘못인 줄 모르는 때가 있고, 우리 가족만 잘 되면 사회질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과오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가정을 가정되게 하는 사랑의 질적 순화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나'라는 개체와 가정이라는 특수체와 사회라는 전체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가정을 통해 사회에 무엇인가 이바지할 수 있을 수 있을 때, 참다운 가정의 책임을 다한다는 건전한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논리적 원칙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규범을 어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흔히 모범이 되는 가정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 그 모범이나 영광의 척도는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모범적인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세도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가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완용은 한때 세도를 누렸지만 그 후손들은 욕된 인생을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당시에는 명성을 떨치던 사람들의 집안이 후회와 부끄러운 가문으로 몰락하는 일도 자주 눈에 뜨인다. 그러면 진정 모범이 되며 영광을 누리는 가정은 어떠한 가정인가. 역시 사회와 역사에 참다운 공헌과 봉사를 할 수 있는 가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효도를 말하나,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진정한 효도는 무엇인가, 자녀들이 귀하게 자라 사회와 국가에 고귀한 봉사를 할 수 있었을 때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족적 사랑은 본능적 요소가 강하게 뿌리를 드리우고 있으나. 우리는 그 내향적이며 폐쇄적인 사랑을 외향적이며 봉사적인 사랑으로 지향시킬 수 있을 때, 참다운 사랑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즐겁게 살자는 요구에서 값있게 살자는 의지를 가꾸며, 우리끼리 잘 살면 된다는 폐쇄적인 생각을 지양하고, 사회 전체와 더불어 뜻있게 살자는 가치추구적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내향적인 본능적 사량에서 봉사적인 의미추구의 사랑으로 옮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가정다운 가정은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가정을 같은 집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때의 집은 지붕과 방들이 있는 물질적 건축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있는 정신적인 집이 더 중요한다. 그 정신적 집이 무엇이냐. 무었울 위해 어떻게 사는가 하는 마음의 내용이다. 온종일 밖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쉬면서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한다. 또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곳이 집이다. 그렇다면 집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힘을 얻고 안식과 사회적 활등의 원천을 지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힘과 신념을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그런 가정이 참다운 가정이 된다. 소망스러운 가정은 바로 그런 성격의 것이다.
가족의식 강한 동양인의 사고방식
우리는 영어를 배울 때 '하우스'와 '홈'을 구별한다. 전자는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집이다. 그러나 후자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가정이다. 가정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것은 '양'적인 것도 아니며 '수'적인 것도 아니다. 굉장히 큰 저택이지만 부끄러운 가정이 있고, 오막살이 단칸집이지만 행복하고 위대한 가정이 될 수도 있다. 집은 가정이 머물기 위해 필요한 부수적인 공간이다. 문제는 그 집들 속에 어떤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집의 구조와 성격에서 가정적 성격과 모습을 엿볼 수는 있다. 대체로 서양인들은 길을 먼저 만든 후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그 집들은 울타리가 거의 없다. 집 문을 열고 나서면 울타리가 없는 뜰이 되고, 뜰 밖은 그대로 길과 이웃, 즉 사회와 통한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은 땅이 넓으니까 그러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 동양인들의 집은 대체로 성격이 다르다. 집을 먼저 지은 뒤에 집들 사이에 길이 생긴다. 그리고 집들은 예의 없이 울타리를 만들어 가진다. 밖에서 들여다볼 수도 없고 또 안에서 밖으로 내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높고 견고한 울타리를 친다. 마치 이 울타리의 고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땅이 좁아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땅이 넓은 중국인들도 그렇게 집을 짓고 살았다. 그렇게 본다면 그 성은 집의 구조와 성격이 그대로 가정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서구인들은 나와 사회라는 사회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가정이라는 가족의식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면 곧 사회가 되나, 우리는 문을 열고 나서면 울타리 안이 된다. 아내를 안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울타리 안의 주인이라는 듯과 통하지 않을까. 서구인들은 모든 면에서 '나'라는 일인칭을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우리'라는 복수인칭을 사용하기 좋아한다. 서구인들은 '우리 아내'라는 말을 들으면 모계가족을 생각할지 모른다. 남편이 여럿이므로 '우리 아내'라는 말을 쓰는 것 같이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아내이나 부모에게는 며느리가 되고, 시동생에게는 아주머니가 된다. 시누이에게는 올케가 된다. 그러니까 어떤 개인의 가족이 아니라 공존생활을 하는 모두의 가족관계와 통하기 대문에'우리'라는 명칭을 애용하는 것이다. 역시 울타리 속에서 같은 내용의 가족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편이 좋으며 또 소망스러운가고 묻느다면 대답을 하기는 곤란하다. 서로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행복과 보람은 제각기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꼭 어느 쪽외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가정의 성격 때문에 서구인들의 가정은 개방적이며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적극성이 강하나, 동양의 가정은 집을 지키며 보수적인 가족 중심의 생활을 귀하게 여겨 왔던 것이 사실이다. 나와 가정이라는 관념은 강했으나, 나와 사회라는 넓은 생활에서는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글 첫머리에 가정은 같은 집에 살면서 함께 일하는 마음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같은 집에 사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함께 일한다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가리기 전에 선행하는 조건을 먼저 얘기하자. 그것은 가족관계에서 오는 상호가능 문제이다. 대가족일수록 서로가 어떤 가족관계를 갖는가 함은 중요하다. 또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가 행복한 생홀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부관계는 사랑의 관계라고 말했다. 부부간에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관계가 있는 일면 건전한 인격적 사랑이 있어야 한다. 신념과 장래가 하나가 되며, 가치관과 생활이 모두 공통성이 있는 인격적 사랑이 귀하다. 부부는 역시 가정의 기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닫힌 가정보다 열린 가정이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서로 친함이 있어야 한다. 옛날부터 '부자유친'이란 뜻을 지녀 온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있으며 이해와 협조가 있는 친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하다. 유교는 전통이 효도를 강조했으나, 우리는 오히려 서구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친'의 질서를 중요시하고 싶다. 젊은 학생들에게 물어보자. 가장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냐고. 그들은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해온다.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부모가 가장 소망스럽다는 결론이다. 부모와 자녀 간의 소중한 관계가 '친'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의 문제다. 부부와 부자는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친하게 맺어질 수 있으나 고부간의 관계는 노력 없이는 선한 가족관계가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아들 집에 다녀와서는 며느리를 나무라고, 딸의 집을 방문한 후에는 사위의 단점을 얘기한다. 그것이 판단력이 없는 늙은 어머니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나는 지급도 한 목사의 가정을 알고 있다. 남편이 없이 아들 하나만을 길러 온 어머니가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겼다는 본능의식 때문에 언제나 며느리에 대한 질투심과 적개심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은 나이가 많은 편이다. 그래도 언제나 여자 손님이 오면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 며느리의 흉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거의 노망기에 가까왔기 때문에 아들인 목사는 손님에게 미리부터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역겹지 않게 들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이다. 이런 일은 그 한 가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떤 가족관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인간적인 이해를 높여가며 전체 가족과 사회를 위해 협조할 수 있는 분위기를 터득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쉽게 말해서 ' 이해가 있는 사람'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그 일이 불가능하면 자신의 불행과 가정의 고통을 해결 지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이야기로 돌아가 우리의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자. 가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족 전체가 선한 봉사심을 갖고 사회적인 일에 참여하는 일이다. 가정의 안식처라는 것은 사회적인 일을 위한 준비처라는 뜻도 된다. 일의 피곤을 가정에서 풀 수 있기 때문에 안식처가 되며 더 값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가꾸는 뜻에서도 가정은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일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고, 값 있는 봉사를 사회에 남길 수 없는 가정은 영광스러운 가정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가족 전체가 선하고 값 있는 일에 참여하며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커진다면, 그만큼 그 가정은 행복해진다. 그리고 자녀들의 장래와 희망도 높아질 수가 있다. 가정적 삶의 표준은 우리 가정이 얼마나 뜻깊은 봉사를 사회에 넘길 수 있는가 함에서 결정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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