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행복하기 위한 조건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면 무엇일까

by 루시경 2023. 4. 17.
반응형

 

모든 불행은 당신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임할 때 그 문제의 해결을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으면 "그러면 내가 할 바는 무엇이지?"라고 묻기보다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도록 할까를 먼저 생각한다. 어떤 일 때문에 고통이나 불행을 당하게 되면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모든 책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마치 나에게는 잘못이 없는데 상대방 때문에 불행과 고통이 오는 듯이 착각을 한다. 가정에 있어서의 불행의 원인도 마찬가지다. 남편을 살피기 전에 나를 살피며, 아니를 탓하기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 해결하면 많은 불행과 고통의 짐은 반감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정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 모든 기관과 조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 책임을 먼저 감당하는 사람이 직장의 주인이 되며, 자신의 역할을 풀어 나가는 사람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추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가정의 행복을 증진시켜 가는 방도로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가정적 불행의 원인은 부부관계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부부간의 어려움은 성격의 차이, 서로의 불신, 능력의 과소평가 등이 그 원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성격은 그것이 그의 사람됨이기 때문에 좀처럼 바뀌거나 쉽게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이지 사과나무로 하여금 왜 배나무가 되지 않느냐는 식의 요망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성격을 탓하면서 왜 그렇게 되지 않느냐고 나무란다든지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왜 당신은 그러냐는 식으로 불평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문제는 성격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격을 어떻게 조정하며 더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를 협조하는 데 있다. 특히 상대방의 가족까지 예를 들면서 당신 부모는 왜 그러냐고 따진다든지, 시가족들의 단점까지 들추어내는 발언은 금물이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없는 언행이거나 발언하는 사람의 인격적 결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에 지나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다면 상대방의 성격은 그 사람의 개성과 인품이기 때문에 계속 소중히 여기면서 협조하고 선도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특히 제삼자와 비교해 가면서 남편이나 아내의 성격적 결함을 지적하는 일은 백의 해는 있으나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권고와 협조일 뿐이다. 그리고 하찮은 일 같으나 우리는 "무슨 남자가 그래"라든지 "여자들은 할 수가 없다니까" 식의 비판은 삼가야 한다. 이성 간의 사랑은 서로의 결함을 보충하며 장점을 확대시켜 가는 것이지 여성 일반이나 남성 일반의 문제로 확대시켜 가면서 볼만을 토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 전체를 원망하는 처사는 삼가야 한다. 여성은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 가급적 상대방의 직업을 과소평가하거나 멸시하는 식의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입버릇같이 "교수들은 하나같이 옹졸하다니까"라는 말 때문에 부인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한 친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전체를 빙자한 남편에의 불만을 노출시킨 결과가 된 것이다. 부부간의 불신만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은 없을 것이다. 그 불신은 어디서 오는가. 쉽게 말하면 인격의 결함에서 온다. 우리는 성격을 바꿀 수는 없어도 인격의 성장은 얼마든지 기약할 수 있다. 애정의 불신도 고쳐 갈 수 있으며 선하지 못한 행위도 노력에 따라서는 많은 시정이 가능하다. 그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불평이나 싸움보다는 보다 높은 인격을 갖춘 쪽이 상대방을 자기의 인격적 수준만큼 끌어올릴 수 있는 노력이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핀잔을 주거나 나도 거짓말을 한다면 그 가정은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진실해지며 진실의 아량으로 상대방을 감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옛날에는 부부간의 부정의 관계가 동등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대부집 남성은 부정의 죄책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여성의 부정은 인생의 종말을 의미했다. 지금도 회교 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오늘의 부정에서 오는 불신관념은 양쪽에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선진사회로 부르는 서구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동등한 관념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부정에 대한 관념은 남녀의 접촉이 많은 사회와 직업일수록 더욱 희박해지는 것 같다. 옛날에는 이성 간의 부정이 사교제를 무대로 자주 벌어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리에게도 이성 간의 문제가 등장되지 않을 수 없어진다. 이런 점들은 감안해 볼 때 우리는 부부간의 부정사실 이전에 부전관념에 대한 정당한 신념이 필요해진다. 또 부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전무하다는 상념은 용납될 수가 없다. 우리는 옛날 수도원 부근에 고아원이 있어야 했고 사찰과 성적 부정이 종종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렸음을 어떤 면에서는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신을 어떻게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역시 우리는 자신과 상대방의 품위와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선한 방향으로 믿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아쉬울 뿐이다. 나는 40대 초반기에 혼자 일 년간 미국에 머 문일이 있었다. 그때 나를 만나는 대부분의 유럽 교수들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처사라고 말했다. 그 연령의 부부가 일 년씩 떨어져 있다는 것은 욕체적 욕망을 위해서도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식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와 내 아내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마음을 써 본 일이 없었다. 우리들의 인습적 관념이기도 했겠으나 서로의 장래를 위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냈다. 물론 부부가 함께 있는 편이 여러 면에서 더 좋은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당시 만일 내가 종교적 지도자였든지 성직자였다면 부정의 문제는 자타가 문제를 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일률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과 가정의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면에서 서로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상대방의 인품을 높여가는 존경과 봉사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내 아내가 나를 완전히 믿고 있으며 내 인격을 존중히 아껴 주고 있다면 그 이상으로 내가 내 아내를 위하여 해주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문제는 부부간 상대방의 능력평가에서 오는 불행이다. 이 능력평가는 극히 다양하다. 음식 솜씨가 왜 그러냐는 불평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들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데 왜 당신은 밤낮 그 꼴이냐고 푸념하는 일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과 불만은 관심을 거기에 쏟을수록 점점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런 경우 우리가 서로 이해하며 협조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선행해야 하는 것은 마음의 자세이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고 해서 책망을 하거나 불평을 말하기보다 아내로 하여금 더 좋은 식탁을 장만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책임이 앞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좀 더 좋아질 수 있는 길의 발견과 협조가 사랑을 두텁게 하며 평생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둘째로 필요한 것은 서로가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서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귀한 것은 장관이 아니다. 사회에 불행과 고통을 주는 장관이 되기보다는 말없이 우수한 물품을 생산하는 기능사원이 귀하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키우는 교육적 봉사가 값지다는 뜻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일의 의미는 사회적 결과에서 따져야 한다. 직책의 고하나 보수의 다소가 우리들의 직업을 가리는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 내 아내는 작을 일에도 ㅚ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세가 귀하며 "내 남편은 남은 모르지만 뜻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표준에서 서로를 도우며 격려를 보내야 할 것이다. 흔히 경제적 보수는 남편의 능력과 가정의 사회적 지위와 비례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좋은 가정은 경제 여건만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부잣집은 가장 좋은 가정이라는 평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가정의 평가는 다양해야 하되 경제는 그 하나의 여건이 될 뿐이다. ㅚ소한의 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경제보다는 다른 면에서 좋은 가정의 표준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부부가 있는 가정에는 능력의 유무나, 무능으로 규정지어질 부부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위와 같은 문제들이 가정의 불행을 초래해 왔다면 우리는 선택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으로 바구어 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사는 가족들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행복 진행형입니다

 

부부의 권리는 지켜야 한다

부부는 사회생활의 제1차적인 공동체이다. 부부를 비롯해서 자녀들이 태어나며 가정은 그 생활의 폭을 넓혀간다. 그러므로 부부는 그 일차적인 자주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아도 안되며, 다른 가족들의 부부의 위치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시부모와의 관계이다. 옛날부터 효도를 존중히 여겨온 한국적 풍토이기 때문에 시부모의 의견이나 주장에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 효도인 양 생각되어 부부의 본래적인 권리까지도 침범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내 친구 한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 모친은 90이 다 된 노모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정의 온갖 살림을 혼자 운영하고 있다. 경제 문제는 물론 몇 백 원짜리 물건을 사도 재정 지출은 당신이 직접 처리한다. 그 친구의 부인은 지금 60을 넘겼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정의 주인다운 주부 노릇을 못해보고 있다. 남편이 회갑을 맞이했을 때 함께 며칠간 제조도 여행을 떠나 본일이 있었다 그 부인은 고백은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로운 생홀은 처음이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 친구와 그 부인을 효심이 지극한 모범가정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그분들이 그것이 목적이어서 기꺼이 그렇게 살기를 원했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러나 한 노인을 위해 그 그늘 밑에서 평생 동안 인간답게 살아 보지 못한 며느리의 입장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가조기 다 그렇게 살아야 하나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어떤 가정 때문이 아니다. 모름지기 생각이 있는 어머니라면 자녀들의 부모로서의 본질과 권리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고 해도 부부의 부부다운 삶을 침범해서는 안 되며 부부의 본질을 파괴할 수는 없다. 비록 신앙이 다르고 인생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부부간의 사람과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내가 잘 아는 의사가 있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남편들의 아내를 얼마나 위해 주고 있는지를 보았다. 그런데 자기 아내도 또 의사이다. 남편은 아내의 가정적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때때로 집안일을 돕는다. 그러나 돕다가도 모친이 나타나면 곧 돕지 않았다는 태도로 바꾼다. "무슨 남자가 마누라 일까지 해주노?"라는 어머니의 핀잔을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가정부가 없을 때는 여의사인 아내가 환자를 멀리하고라도 집안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남편보다도 시부모의 입장을 고려해서이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모른다. 환자에 대한 의사로서의 의무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효도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상에 귀한 것도 효도만이 아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효도 못지않게 귀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청소년들에 의한 불행이 어디서 왔는가. 효도를 요청하기 이전에 부모다운 부모가 되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선한 가정은 사랑이 있는 부부로부터 탄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성장한 자녀들이 연로한 부모를 대하는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늙은 부부도 부부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 노부모라고 해서 집을 지키거나 손자들을 위해 세월을 보내라는 법은 없다. 일단 사람이 결혼을 하면 부부생활이 지속되는 동안은 부부로서의 주체성과 권리가 지켜져야 하며 그 사랑의 성장과 발전이 거듭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은 가부장제도의 가족관계나 대가족제도에 있어서는 이 엄연한 요청과 권리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라도 부모의 소유는 아니다

가정의 가장 비중 큰 요소 중의 하나는 자녀를 가짐이다. 요사이는 자녀에 관한 생각이 퍽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가정이 자녀를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며, 우리 부모가 자녀를 거부했다면 나 자신의 존재 의의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자녀를 키우는 일은 어렵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자녀 양욱과 교육의 문제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아무리 애를 썼어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며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자녀로 성장했어도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자녀를 나의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유로 착각하며 그 자녀에 대한 욕망이 언제나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왔다. 자녀가 내 소유가 아닌 독립된 인격체이며 자녀에 대한 욕망만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녀로부터 얻는 행복과 즐거움이 자녀 때문에 오는 고통이나 불행보다 훨씬 비중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에의 사랑이 악화되는 것도 아니며 자녀에의 기대가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참다운 사랑을 하게 되며 자녀들의 독립된 인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 한다는 생각보다는 소중한 장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해야 하며, 내 아들이나 딸이기 때문에 행복해져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자립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는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어떻게 최선의 삶을 누리도록 하며 값있는 인생을 살도록 협조해 주는가 함에 있다. 그러기에 슬하에 두고 싶은 외아들을 외국으로 보내며 하나밖에 없는 딸을 국제적인 봉사단체에도 가입시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최상의 인생을 살도록 돕는 길은 어떻게 자녀들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 값있는 봉사를 하며 그 봉사의 대가가 영구 해지는가를 찾음이다. 아홉의 이기적인 자녀보다는 한 자녀의 뜻있는 봉사적 업적이 귀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우리는 모든 가족이 가정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을 최상의 가정으로 생각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가정의 조건이 채워진다면 우리는 더 많은 불행을 덜고 더 높은 행복에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성장과 성취 그 자체를 사랑하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언급해 온 몇 가지 뜻들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요.

 

댓글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