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 스승 삼연 김창흡과 봉래산에 올라 시와 그림을 그리다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며 봉래산으로 가는 초입인 단발령을 오르고 있었다. 조금 뒤처져서는 두 사람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제 환갑이 가까운 그는 한창나이인 제자들처럼 활기차게 걸음을 내딛지는 못했으나, 익숙하고 침착해 보였다. 그에게는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금강산행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천, 이 고개를 왜 단발령이라고 하는 겐가?" "신라가 망할 때 왜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라고 불리는 분이 계시지 않았나. 부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니까 그분은 부친을 거스를 수도 없고 망국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지. 그래서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베옷에 지팡이 짚고 이곳 ㅂㅇ래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치셨는데, 단발령 고개에서 비로소 머리를 깎으셨다는 거야. 그래서 고개 이름이 달발령이 되었다네."...... 슬픈 애기로군." "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입산할 때는 '개골산'이었다는군. 자네도 알다시피 이 산은 철 따라 이름이 바뀌는데, 마의태자는 우리처럼 봄이 아니라 겨울에 이 고개를 지나셨다는 거지. 어쩌면 눈이 하늘 가득 메워지도록 내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 광경은 온 천지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여 소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 "과연 자네답게 상상력이 뛰어나구먼! 아무튼 이대로도 험한 길인데, 눈까지 내렸다면 참으로 발걸음을 떼기가 두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그려." 당시(숙종 37년. 1711년) 정선은 36세. 이병연은 41세. 두 사람의 우정은 이미 이십 년 시기를 넘고 있었다. 십 대 시절 김창흡에게 글공부를 받으며 어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병연이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친구로 터놓고 지냈다. 그런데 둘 다 과거에는 뜻이 없어, 경전 공부를 하는 짬짬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한가롭게 생활했다. 그러다가 이병연이 먼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마흔 살이 되던 1710년에 금강산과 지척인 금화현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천하의 봄에 스승 김창흡과 둘도 없는 벗 정선을 초청한 것이다. "자. 자! 다 왔네! 공터일세! 스승님도 어서 올라오십시오!" 앞서 가던 이병연이 어린 소년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잠시 후 공터에 오른 정선은 친구가 그처럼 흥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만 이천 봉이라고 했던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를 때는 바위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금강산의 자태가 손에 잡힐 듯 지척에 있었다. 도저히 자연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묘하고 빼어난 봉우리들이 어서 오라는 듯 산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말로만 들었던 천하절경을 직접 본 정선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스승과 제자들은 한동안 숨쉬기도 잊어버린 듯 꼼짝 않고 서서 금강의 봉우리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김창흠이 휜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침묵을 깼다. "어떠냐. 이 광경을 보고도 시흥이 느껴지지 않느냐? 병연아. 너는 어떠냐?" "느끼다 뿐입니까. 다만 제자의 재주가 비천하여 느낀 바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한번 들어보시지요."
아래로 드리운 길은 구불구불 용 오르듯.
높은 봉우리에 다 올랐음은 두 그루 소나무로 표시하네.
갑자기 신천지의 밝은 세상을 본다.
신선이 금 자물쇠를 열어 세상에 새벽을 가져오니.
보석 같은 하늘에 하얀 연꽃이 매달려 있네.
어떤 사람 여기 와서 보고 기쁨에 넘쳐
머리 깎고 표연히 세상을 등졌다지.
"좋은 시로구나. 단지 경치 좋은 곳을 바라만 보며 지은 것이 아니라, 힘들여 올라와 길 끝에서 천하의 절경을 보고 가슴이 트였음을 잘 나타내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선이가 한 수 지어보겠는가?" 그러나 정선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그러느냐? 알맞은 시구를 찾지 못하겠느냐?" "지으라면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오나...... 못난 제자는 시보다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림이라?" "그렇습니다. 태어나서 이처럼 벅찬 광경은 처음입니다. 저는 어차피 스승님이나 사천에 비하면 시재가 미천하오니 굳이 문자를 써서 감동을 나타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부족한 실력이오나, 이 광경을 그림으로 담아 봉래산의 웅장함과 교묘함을 천분의 일이나마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김창흡은 정선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선의 얼굴이 일만 이천 봉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붓을 놀릴 듯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김창흡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참으로 즐겁구나. 여기 금강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그래도 이미 다섯 번이나 본 것이다. 그러나 너희 두 사람이 품고 있는 재주의 진면목은 이제야 처음 보는구나........ 선아." "네. 스승님!" "방금 네가 한 말을 잊지 말거라. 돌아가는 대로 너는 이 광경을 그리거라. 이제부터 저 봉우리들을 다니며 보고 느낄 것들도 남김없이 화폭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 그림이 얼마나 병연이의 시와 짝할 수 있는지, 과연 시와 그림 중 어느 쪽이 금강의 진면목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지, 너희는 경쟁하면서 또한 서로 돕도록 하여라. 알았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정선과 이병연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선과 이병연, 금강산이 만남으로 중국화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화법의 길을 가다
이것이 진경산수화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 '진경 문화'의 시발점이 된다. 글보다 그림에 더 흥미를 가졌던 정선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천분은 그림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스승의 말대로 금강산 유람의 경험을 그림으로 풀어내는데, 그 결과가 《신묘년풍악도첩》이다. 이 도첩은 《단발령망금강산도》를 비롯한 열세 폭의 금강산 그림과 그림마다 화재를 주는 이병연의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경산수화란 흔히 착각하듯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묘사하는 그림이 아니다. 과거의 조선 산수화가 중국 산수화의 기법을 베끼는 데 그쳤고 그 때문에 생동감과 호소력이 결여된 관념적인 그림이 양산되었다면, 정선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산수화가들은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중요한 것은 그림에 ' 본 것'만이 아니라 '느낀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선은 김홍도나 신윤복 같은 화원 출신의 직업 화가가 아니라 선비 출신의 문인화가다. 율곡 이이에서 우암 송시열, 삼연 김창흡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으며, 그림에서 사물 그 자체의 모습에 충실하기보다 어떤 이념을 구현하려는 입장에 있었다. 정선은 자신의 그림에서 산의 바위가 두드러진 부분은 양'의 풍경이라 하여 중국 북종화의 선묘법을 살리고, 흙과 나무가 덮인 부분은 '음'의 풍경이라 하여 남종화의 묵법을 살려 표현했다. 중국 산수화의 양대 기법을 하나로 종합하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 사물을 형성한다는 성리학적 이념 또한 구현해 낸 것이다. 조선인의 감각과 기량으로 조선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해 냈다는 점은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망한 이상 진정한 문명의 종주국은 우리 조선이다'라는 조선중화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처럼 깊이 있으면서 또 철저했던 정선의 그림은 1711년의 금강산유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좋은 벗이자 글로써 정성의 그림을 자극하고 보완해 준 이병연이 없었어도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날 정선은 한국 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큰 변혁을 이룬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양대 기법을 종합하고 진경산수의 오의를 개척해 낸 정선으로 인해 비로소 한국화는 중국화의 아루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정선과 이병연. 그리고 금강산이 만남으로써 그런 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정선과 이병연은 주위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와 그림을 연구하다
글공부를 한 선비임에도 벼슬살이를 하지 않던 정선은 금강산 유람 10년 뒤인 1721년 하양현감에 부임했다. 스승이 힘을 써준 덕이었다. 그러나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노론을 박해한 신임사화로 스승 김창흡의 형 김창짐이 사사당하고 그 충격으로 김창흡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면서(1722), 그 이상의 출세는 어려워졌다.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복권되면서 한때 의금부도사를 맡기도 했으나, 정계의 중심으로 발을 디디지 않고 사단을 경성하여 시와 그림을 연구하는데 주력했다. 이병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조 치하에서 한성우윤가지 역임했으나 살벌한 정치판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았다. 정치 일선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여기거나 멸시했다. 김창흡의 학맥에 버젓한 집안 배경도 있는데 왜 그렇게 변두리로만 돌며 '잡기'로 세월을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정선이 사도첨정이라는 직위에 임명되었을 때 '천한 재주로 이름을 얻고 잡로(과거를 통하지 않은 음직)로 뽑힌 자"라며 부당한 인사라는 비판이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정선도, 이병연도 그런 평가에 아랑곳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길을 계속 갔다. 그런데 정선의 그림, 그리고 진경산수화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이 있었다. 성리학자 김창흡은 아마도 몰랐을 것 같고, 어쩌면 정선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는 그 특성 또한 물과 고기 같은 사이였던 이병연에 의해 분명해졌다.
한성우윤 이병연이 죽었다. 이병연의 자는 일원으로 한산 사람이며, 호는 사천이다. 성품이 맑고 드넓었으며, 어려서 김창흡을 따랐다. 수만 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기가 이따금 옛 대가들을 압도하기까지 하여,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자들이 종종 본보기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영조 27년(1751) 윤 5월 29일 기사
빛이 보이는 순간적인 시각 효과에 개인의 느낌을 더하다
당시 정선도 76세에 이르러 있었다. 80세를 넘겨 죽은 이병연이나 그는 충분히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정선은 그 후 8년을 더 살고, 1759년에 84세로 죽었다). 하지만 무려 반세기가 넘도록 함께 울고, 웃고, 경쟁하고, 격려하며 지내온 친구가 먼저 떠났다. 처연함과 쓸쓸함이 없을 수 없었으리라. 그가 죽음을 코앞에 둔 벗 이병연을 위해, 이병연의 집을 배경으로 버티고 선 인왕산의 비 온 뒤 풍경을 그린 것이 유명한 <인왕제색도>다. 그림을 보면 실제 인왕산의 모습을 충실히 묘사한 듯하지만 사실 어둡고 슬픈 기운이 그림 전체에 서려 있다. 그러면서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나 미칠 듯한 격정은 없다. 값진 시간을 오랫동안 함께했으니 축복받은 일, 하지만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이별과 종말은 슬픈 법. <인왕제색도>에는 정선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고, 그 마음에 따라 구도와 먹의 농담이 실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풍경을 실제 풍경에 대입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이념에 따라 실제 풍경을 재구성한 것도 아니다. 바로 화가 개인의 감정을 화폭에 구현한 것이다. 정선이 그린 인왕산의 바위는 실제보다 검고 칙칙하며, 박연폭포의 물줄기는 실제보다 몇 배나 높은 곳에서 힘차게 떨어진다. 울진 성류굴의 바위그림은 먹으로 그렸으나 푸른빛이 도는 듯하며, 실제 바위의 질감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최대한 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해' 빛이 던지는 순간적인 시각 효과까지 재현하려 했던 서구 인상파의 기법을 따르되, 불타는 듯한 하늘, 원근법이 무시된 사람과 나무, 그림자가 없는 꽃병등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화가 개인의 느낀 것을 보다 충실히 표현하려 했던 후기인상파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효종에서 숙종대에 수립된 엄격하고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성리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영조. 정조 시대로 넘어가 그 꽃이 화려하게 필 때, 그것은 '개성'의 실마리를 품고 있었다. '물과 고기의 만남'은 문과 무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강력한 새 나라를 이룩하는 만남부터 두드러졌다. 그리고 최고통치자와 그를 보좌하는 신하의 만남이 이어졌다. 국권과 왕권의 드라마가 오랫동안 펼쳐진 끝에, 결국 '개인'의 실마리를 보면서 근대의 길로 달음질치게 되는 여정을 내비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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